공간 디자이너가 만든 정원보다 예쁜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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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상복합 아파트 신드롬을 이끌며 주거 공간 디자인 대가로 떠오른 건축가 최시영. 왕성한 작업을 이어가던 그가 2017년 경기도 광주에 ‘파머스 대디’라는 농장형 정원을 대중에 오픈했다. 방문객은 입장료를 내면 음료를 제공받고 정원과 온실을 자유롭게 누빈다. 그동안 수많은 정원·식물 마니아가 방문했고 인터넷은 순식간에 후기들로 채워졌으며 인기에 힘입어 인근에 2호점까지 열었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타워팰리스를 설계한 디자이너는 어쩌다 밭과 비닐하우스 온실을 만들었을까?
파머스대디를 만든 계기는 무엇인가
그동안 일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체력은 물론 정서적으로도 고갈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목장을 운영하셨던 아버님께 물려받은 땅을 일구고 채소와 꽃을 가꾸면서 서서히 멘탈이 회복되어갔다. ‘세상의 속도와 정반대인 느리게’라는 철학에 빠져 식물을 통해 위로받고 자연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7~8년을 프라이빗 가든처럼 가꾸다가 재작년 정식으로 대중에 오픈했다.
요즘 플랜테리어나 온실 카페, 반려식물 등 식물이 대세다. 트렌드에 민감한 공간디자이너라 유행을 예견한 것일까
유행이 아니라 이건 올 수밖에 없는 큰 물결이라고 생각했다. 갈수록 삶은 더 고단해지는데, TV를 틀어도 모든 것들이 부정적이다. 사람은 어딘가에선 위로를 받고 감정을 풀어야 한다. 분노가 쌓인 사회, 혼탁한 사회일수록 사색이 필요하다. 정원이 적합한 공간이다. 앞서 말한 힐링과 최근 이슈인 공기 질.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데 식물이 빠질 수 없지 않나. 나는 이 현상을 아울러 ‘잇 그린(it Green)’이라 부른다.
공간 디자이너가 만든 정원인데, 비닐하우스 온실이라 놀랐다.
용도지역이 전(田)이라 비닐하우스만 가능했다. 그래서 형태적으로 변화를 주고 녹색 프레임을 써 조금은 차별화했다. 작업하면서는 왜 비닐하우스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자재를 공식 명칭으로 쓰니까 사람들이 수십 년째 처음 프로토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만들었지만, 또 누군가는 자기만의 스타일로 비닐하우스를 꾸몄으면 좋겠다.
기존에 봐왔던 조경 스타일의 정원과 다르다
정원에는 단순히 조경을 위한 꽃, 수목이 아니라 블루베리, 수박, 고구마, 토마토, 부추 등 채소를 기르는 밭에 야생화, 데이지, 메리골드 등 꽃이 무심한 듯 심겨 있다. 우리 어렸을 때는 흔히 ‘꽃밭’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걸 구현하고 싶었다. 밭도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밭이 예쁘다는 것이 잘 상상이 안 된다
해외 농촌 지역에 가보면 농사짓는 땅과 수로를 디자인하고 경계에 다양한 꽃을 심는다. 주말에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서는 수확한 농작물뿐만 아니라 꽃도 판다. 본인들이 화훼업을 해서가 아니라, 밭 옆에 심어둔 꽃을 파는 것이다. 과수원에서 세미나를 하고, 농장 가운데에서 전구를 달아 팜 파티(Farm party)를 근사하게 여는 등 밭 가지고 입장료를 받는다. 실제로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가 열리기도 했다. 밭이 문화의 일부로 인식되는 것이다.
30년 넘게 공간디자인을 하다가 농사를 시작했을 때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 1년 정도는 수로를 만들고 땅을 개간하는 데 시간을 썼다. 장마가 한 번 오고 나니까 예쁘게 쌓은 수로는 사라지고 잡초만 무성히 다시 자라 있곤 했다. 블루베리를 심은 첫해에는 한 알도 못 먹었다. 토요일에 보고선 ‘월요일에 따러 와야지’ 했더니 그사이 새들이 와서 다 따먹은 것이다. 그렇게 그물 치는 시기와 방법을 익혔다. 여름이 지나고 아끼던 꽃이 다 시든 적도 있는데, 물이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여름 호스 안에서 데워진 뜨거운 물로 적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배웠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배움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고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세상의 속도와 달라 균형을 잡아준 귀한 시간들이다.
마당 있는 집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관리가 걱정돼 잔디 심기를 주저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나는 정원을 가꾸는 노동을 ‘착한 노동’이라 부르고 싶다. 무언가를 멋스럽게 꾸미고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때로는 그 과정과 결과가 인생관을 바꾸기도 한다. 정원을 돌보면서 변화된 사람들을 많이 봤다.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자면, 잔디를 심되 잡초가 잘 안 나오도록 멀칭을 충실히 하면 된다. 나는 물은 통과하지만 햇빛은 못 보게 하는 부직포를 도포하고 그 위에 벽돌과 까만 비닐을 깐 후 마사토를 뿌린다. 멀칭도 자기 땅, 자기 스타일에 맞게 하면 된다.
많은 정원이 봄에서 가을은 아름답지만, 상대적으로 겨울은 황량하다.
여기는 향나무, 제주도에 많이 심는 실유카 등의 상록수를 심었다. 꽃 중에는 초록 잎을 겨울까지 가져가는 샤스타데이지, 풀처럼 나는 수오초도 오래도록 푸르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차피 월동하는 식물 자체가 적기 때문에 잎이 떨어지고 난 뒤 겨울이면 나뭇가지가 빨갛게 변하는 말채나무를 심는 것도 방법이다. 빨간 가지 위에 흰 눈이 내리면 아주 근사하다.
타워팰리스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작업인 전경련 회관의 스카이팜, 이천 에덴낙원 메모리얼 프로젝트 등도 인상적이다
모두 ‘그린(green)’이 연결고리인 작업이다. 특히 이천 에덴낙원 메모리얼의 경우 가든을 중심으로 봉안당의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나도 부모님을 경기도 안성의 납골당에 모셨지만, 십수 년을 가도 낯설고 죄스럽게 느껴진다. 거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갈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 사람을 위한 봉안당을 만든 것이다. 유명 브랜드 카페와 레스토랑을 입점시키고 음악회, 숙박, 심지어 결혼식도 올릴 수 있게 계획했다. 그 중심에 가든이 있다. 조경 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더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나는 에덴낙원을 기점으로 앞으로의 장묘문화도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바야흐로 ‘잇 그린(it Green)’의 시대인가
내 자신의 멘탈을 돌보고자 정원 일을 시작했고 순수하게 취미로 즐기지만, 식물들을 만나고 파머스대디를 만든 후 관련 공간디자인 의뢰도 더 많이 들어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사회가 그린을 필요로 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거창할 것 없다. 트렌드를 따라갈 필요도 없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꽃을 심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당신 마음에 있는 꽃을 심어라. 거기서 당신의 정원이 시작된다.
● 천편일률적인 수로 대신 이런 건 어때요?
온전히 기능적인 역할만 할 거라 생각하는 수로. 빨간 벽돌로 페이빙하고 주변부에 아기자기한 꽃들만 심어도 훌륭한 볼거리가 된다. 배수는 농작물과 식물에 아주 중요한 부분인 만큼 위치 선정과 경사도도 철저하게 신경 써야 한다.
● 프레임만 잘 만들어도 그럴듯한 디자인
넝쿨 식물은 물론 일반 작물에 아치형, 박공형 등으로 디자인한 프레임을 세워두면 야외 공간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
● 관목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하늘정원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로 관목을 둘러 심고 정중앙에 아주 작은 수공간을 두었다. 네 구석에 둔 의자에 앉아 있으면 오직 바람과 초록과 하늘, 그리고 물에 반사된 구름과 나만 있을 뿐이다. 농장에 사색의 공간이 없으란 법은 없다.
취재협조
파머스대디|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380
10:00~18:00|입장료 : 성인 8,000원, 어린이 6,000원
취재_ 조성일 | 사진_ 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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