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제주 친봉산장에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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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든 아이리시 커피 한잔이면 쌀쌀한 바람에 움츠렸던 몸도, 마음도 어느새 훈훈한 온기가 돈다. 제주 송당마을, 무심한 듯 다정한 산장지기의 초대.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보통이라면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을 그런 날씨. 하지만 목적지가 ‘친봉산장’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흐린 하늘과 빗줄기가 오히려 정취를 더하는 곳. 제주 구좌읍 송당마을, 돌담 사이 이어진 골목 안 커다란 산장 한 채가 어슴푸레 불을 밝혀 손님을 맞았다.
깊은 산속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산장다운 곳도 없으리란 생각이 절로 드는 곳이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자 초에 불을 붙이던 산장지기가 눈인사를 건넨다. 김현철 씨가 하던 일을 접고 제주도로 내려온 건 3년 전. 화려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더는 없었고, 반복되는 일에도 지쳐 갔다.
비에 젖은 외벽과 바닥, 풀과 나무가 오히려 운치 있게 느껴지는 친봉산장 전경 맑은 날에는 야외 공간에 둘러앉아 캠핑을 즐길 수 있다. / 산장지기 현철 씨와 친봉산장의 마스코트 래미 그림은 손님들의 선물 자연 가까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자 제주행을 택했다. 10년 이상의 캠핑 경력에, 산과 계곡을 좋아하는 그는 중산간 지대인 이곳 송당마을에 자리 잡았다. 처음 6개월은 오랜 로망을 펼칠 공간을 찾아, 또다시 6개월은 산장을 고치느라 쉬는 날도 없이 고군분투했다.
서부영화 속 근사한 통나무집을 떠올리게 하는 친봉산장은 50년도 더 된 건물이다. 마구간으로 쓰던 곳인데, 내부 철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기초를 새로 다지고 바닥을 깔고 화장실 배관공사까지, 전기공사처럼 전문기술자가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웬만한 건 직접 해결했다.
나무를 깎으며 시간을 보내는 현철 씨 곁에는 늘 래미가 함께한다. 나지막한 천장의 다락은 현철 씨가 실제 생활하던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펼쳐지는 친봉산장의 내부. 거친 나무 질감과 빈티지한 가구와 소품 등이 어우러져 서부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오름이 많은 송당마을은 말을 방목해서 키우던 곳이라 먹이로 쓰던 억새가 많다. 이를 엮어 의자, 테이블로 만들어 놓았는데, 인더스트리얼 소품들과도 멋스럽게 어우러진다. / 친봉산장은 사슴을 테마로 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슴 장식과 직접 만든 사슴뿔 공예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공구에 손가락이 끼여 절단되는 부상도 겪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손가락의 안부를 묻자, 그는 멀쩡해진 손을 펴 보이며 “이런 에피소드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호탕하게 웃는다.
원래는 뒷마당에 있던 세 그루의 큰 나무에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보며 구상해두었던 트리하우스도 만들 생각이었다. 비록 공사 중 찾아온 태풍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친봉산장은 <톰 소여의 모험>에 등장할 법한 공간이다. 7년간의 연구 끝에 손수 만든 벽난로에선 장작이 붉게 타오르고, 그가 수집해온 빈티지 의자와 테이블, 바이크, 기타, 캠핑용품 등이 곳곳에 자리한다.
한쪽 벽에 전시된 기타들과 빈티지 바이크 오랜 독학 끝에 만든 벽난로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어렸을 때부터 꿈꿨던 공간이에요. 제가 사는 집이라 생각하며 만들었고, 산장을 찾아주는 분들도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기분을 느꼈으면 했죠. 실제로 1년 반 동안은 제가 이곳 다락에서 잠을 자며 살기도 했고요.”
친봉산장은 산장지기 현철 씨와 반려견 래미가 연중무휴 자리를 지킨다. 커피 메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직접 배워와 내리는 아이리시 커피, 단 하나다. 그 외에는 한라봉 주스, 다양한 맥주 등을 판매한다. 바비큐나 가칭 ‘가가멜 스튜’ 같은 식사 메뉴도 준비 중이라고. 물은 서비스하는 대신 생수로 판매하는데, 1년간 모인 수익금은 5살 유기견으로 처음 만났던 래미의 생일날, 유기견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아이리시 커피를 만드는 현철 씨. 달콤한 크림 뒤로 어우러지는 커피와 위스키 향이 일품이다. 사슴뿔로 핸들을 만든 커트러리들 / 뒷마당을 향한 문을 열면 싱그러운 초록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쪽 마당에 있는 별채 창고와 친봉산장 너머로 푸른 제주 풍경이 펼쳐진다.현철 씨에겐 제주도에 와서 생긴 변화가 두 가지 있다. 어떤 거짓말도 할 일이 없게 된 것, 그리고 거울을 잘 안 보게 된 것.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나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제주의 삶은 도시의 것과는 참 다르다.
그는 언젠가 커다란 산 하나를 온전히 지키는 진짜 산장지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창틈으로 새는 비를 막을 생각도 없이, 무심하게 받쳐둔 양철 그릇에 떨어지는 빗방울조차 감미로운 풍경이 되는 곳. 비가 개고 난 밤이면 자욱한 비안개 사이로 친봉산장 마당의 모닥불이, 벽난로 굴뚝의 연기가 느긋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친봉산장_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중산간동로 2281-3 인스타그램 @jeju_deerlodge
취재_ 조고은 | 사진_ 변종석
ⓒ 월간 전원속의 내집 / Vol.236 www.uuj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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