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 | 꽃과 음식이 만나서, 맛있는 정원
본문
유니스의 정원은 ‘행복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지승현 씨의 낙천적이고 소박한 삶의 철학이 담긴 곳이다. 자연을 존중하고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녀.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위해 한 걸음씩 노력해 온 모습이 그녀의 고요하면서도 유쾌한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취재(월간 전원속의 내집)·김연정 기자 │ 사진·변종석 기자
취재협조·유니스의 정원 031-437-2045 http://www.eunicesgarden.com
그녀, 새로운 꿈을 꾸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 후 그렇게 원하던 꿈의 직장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2년 후 그녀는 또 다른 행복을 찾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한다. ‘스스로 만족하는가’ ‘잘하고 있는가’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하다.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인생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 무슨 일을 하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또 매순간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하지만 혼자는 뭐든 힘든 법이다.
MBA 졸업, 맥킨지 근무. 경제나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꿈꿔봄직한 길. 쉽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꿈의 길을 걸었다. 가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뤄냈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앞만 보고 2년을 달렸다. 하지만 늘 마음 속 허전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누가 보아도 현실적으로 좋은 직장이지만 과연 이 일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에 대해 며칠 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러다 누구나 인정해주는 성공적인 삶을 산다 한들 그것이 나 자신에게 보람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죠.”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좋아한 그녀는 나이가 들어 일을 그만두게 될 때쯤 꼭 내 손으로 직접 가꾼 정원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간은 조금 빨리 찾아 왔다. ‘하고 싶은 일, 지금 당장 해보자’라는 굳은 결심 하나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가족,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선택의 순간 그리고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마음은 먹었지만 실천을 하자니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을 믿고 함께 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할아버지의 선산 한 필지를 내주었고, 남편은 MBA를 위해 받았던 융자도 아직 남은 상태였지만 신혼집까지 정리해 정원을 가꾸겠다는 그녀를 묵묵히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한명. 새출발을 하는 동생을 위해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준 언니(그녀의 언니는 건축가 지승은 씨다). 그녀를 가장 잘 알기에 굳이 이것저것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쏙 드는 집과 정원의 기초를 완성해 주었다.
그렇게 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서울에서 출퇴근해야 하는 남편과 떨어져 혈혈단신 안산으로 내려와 그녀만의 정원 가꾸기를 시작했다.
보는 것이나 좋아했지 화분 하나 길러본 적 없는 그녀에게 가드닝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조경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무조건 묻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 열이면 열 모두 대답이 같았다. 잘나가는 야생화 정원을 참고해서 그대로 꾸미라는 것. 그래야 사람들도 많이 찾아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 것은 자신만의 색이 듬뿍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코티지(전원풍) 가든이었다.
“쉬는 날이면 늘 식물원과 수목원을 찾아다녔지만 그때마다 느낀 것은 ‘아, 식물이 정말 많구나’ 정도였지 그 이상의 감동은 없었어요. 제가 원한 것은 숨막힐 정도로 잘 꾸며놓은 모델하우스가 아닌 친구가 직접 모은 것들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는, 그런 정감있는 정원이었죠.”
정원, 드디어 깨어나다
사람 손닿지 않은 듯 ‘자유롭고 편안한 정원’이 좋다. 각기 다른 꽃들이 경계 없이 섞여도 좋고, 군데군데 잡초가 있어도 괜찮다.
딱히 배울 만한 곳도, 그녀에게 많은 정보를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가드닝 관련 외국 서적들을 보며 공부를 시작했다. 혼자서 알아가야 하는 만큼 수도 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책에서 정말 탐스럽게 핀 꽃을 보고 어렵게 씨를 구해 심었지만 사진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싹도 틔우지 못한채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꾼들을 부려 대대적인 공사를 했으면 쉬웠겠지만 스타일에도 맞지 않고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혼자서 정원을 만들어야 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풀 뽑는 아주머니를 고용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같은 품종으로 쭉 심는 게 아니라 여러 품종을 조금씩 사다 심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은 것이고 어떤 것이 잡초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다.
“산책로 한 공간에만도 씨앗 20여 종을 섞어 심었어요. 그러니 어느 것이 잡초인지는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구분하기 힘들죠. 게다가 싹이 틀 때 즈음이면 주변 산 위에서 온갖 종류의 풀씨들이 날아오니 인부를 쓰고싶어도 도저히 쓸 수가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선산을 지키시던 칠순의 할아버지와 앉아 하루 종일 잡초를 뽑았다. 한참을 뽑고 돌아 나와 보면 어디선가 또 풀씨가 날아와 자라 있고, 그러면 또 뽑아내고, 그러길 수십 차례 반복했다.
흔한 농약 한 번 쓰지 않고 하나 둘 손으로 가꾸다 보니 시간은 점점 더 늦어지고 그렇게 어느 정도 모양새 갖춘 정원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3년 6개월. 땀과 노력으로 가꿔낸 그곳에 그녀는 자신의 세례명을 딴 ‘유니스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발견, 산책로 그리고 레스토랑을 만들다
그곳엔 그녀가 직접 키워 말린 허브로 끓인 따스한 차와 정성껏 구워낸 빵,
그리고 여유롭고 따뜻한 시선이 있다.
산책로는 하루 종일 산에서 날아온 풀씨를 솎아내던 그녀가, 공들여 가꾼 곳 중 하나이다. 바람의 정원, 새들의 쉼터, 계류정원 등 걷는 중간 중간 다양한 공간을 만들고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덕분에 산책하는 길은 지루하지 않다. 길을 걷다 보면 다른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이 있는데 ‘새들의 쉼터’의 새집들이 바로 그렇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빛을 띠는 새집은 발리에서 수공예로 만든 것을 들여와 여러 번 문지르고 칠해 완성한 것이다. 워낙 산에 새들이 많아 쉬다 가라고 만들어놓은 것인데 요즘은 여기에 다람쥐도 살고 개구리도 산다.
그리고 또 한 곳. 정원을 구경한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마련한 카페와 레스토랑. 이곳은 정원만 가꾸고 유유자적 살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피할 수는 없었던 그녀가 만든 이곳의 유일한 상업공간이다. 처음엔 정원 내 음식반입을 금지하고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파냐며 오해아닌 오해를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진심은 통한다 했던가. 지금은 정원을 찾는 손님뿐 아니라 따뜻한 차 한잔, 정성 담은 요리를 먹기 위해 들리는 분들도 많다.
화초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채소 가꾸는 소질도 타고 난 그녀이기에 카페와 레스토랑의 웬만한 재료들은 텃밭에서 기른 것을 사용한다. 파스타, 스테이크 등 이태리 요리가 레스토랑의 주메뉴인데, 얼마 전 레스토랑 옆 정원 한 켠에는 손님들을 위한 바비큐 시설을 만들었다. 미리 예약하면 로즈마리, 오레가노 등 8가지 천연 향신료와 함께 숙성시킨 맛좋은 훈제 바비큐를 맛볼 수 있다고.
텃밭을 가꿀 때는 쉽지 않았지만 노력의 결실이 이렇게 몇 가지 목적으로 쓰일 때 그녀는 가장 만족스럽다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도전,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은 많다
정원을 만들고 나서 하나 둘 모여든 유기견들을 거두는 그녀. 많은 사람들과 자신이 꾸민 정원을 함께 나누고 싶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한다.
잘 정비된 곳도 아니고 규모가 크거나 식물의 가지 수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무언가 따뜻함이 묻어나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지승현 씨의 바람이다. 작은 곳 하나도 고민과 걱정으로 만들었다. 힘들었지만 그런 부분을 읽어내고 칭찬해주시는 손님들을 보면 뿌듯하기만 하다.
9만㎡의 부지에 정원으로 가꾸어 놓은 대지는 불과 5분의 1정도. 앞으로 계속 지낼 곳이기에 틈이 날 때마다 몸을 움직여 여러 가지 테마의 소정원들도 더 늘리고 레스토랑의 메뉴도 다양하게 개발해 나가려 한다. 기회가 되면 예쁜 전시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여자 혼자 힘들지 않나요?’라고 묻는 분들도 많으세요. 하지만 전 정원의 나무나 꽃에게 특별한 걸 해주지는 않아요. 그저 좋아하니까 나무나 꽃에게 좋으리라 생각되는 것, 나무와 꽃이 기뻐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을 뿐이죠. 잡초 뽑기나 물주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필요한 비료만 제대로 주면 정원은 곧 화답해주니까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