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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은 건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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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82-02 / 전원속의 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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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정리 이세정

일본의 건축 전문 월간지 ‘신건축/주택특집(新建築 住宅特集)’에 과거의 한 일화가 소개된 적이 있다. 건축가들이 모인 작은 파티에서 일어났던 일인데, 김수근 선생의 동경대 대학원 동기생이자 친구이기도 한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라는 대선배 건축가가 이런 화두를 던졌다.

“주택은 건축인가?”

그보다 선배이자 주택 설계 활동을 주로 해 온 시노하라 카즈오(篠原一男)는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나버렸고, 이토 토요오(伊藤豊雄) 등 남은 후배 건축가들은 논쟁을 계속했다. 훗날 그 일을 전해들은 한 건축가가 자신의 해석을 더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게 된다.

“2000년 이전에는 그나마 공공건축의 현상공모가 사회에 새로운 건축의 모습을 제시하는 희망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변했고 지금의 공공건축 현상공모는 이해하기 쉬운 제안으로 어떻게 시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지 경쟁하는 장으로 변모해 버렸다. 이런 시대에 어쩌면 ‘주택’만이 건축주(특정 고객)의 합의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건축가가 의도한 공간을 실현하는 ‘설계 사상의 순수한 표현의 장’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정 고객과 그 가족에게만 초점을 맞춘 배타적인 공간, 혹은 너무나 특수한 해답은 과연 시대를 초월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건축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건축가는 문장 속에서 ‘배타적인 공간’이나 ‘너무나 특수한 해답’이라는 표현을 들어 주택 설계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 이질감을 금할 수 없었다.
‘주택이 특정 고객의 합의만 얻을 수 있다면 설계 사상의 순수한 표현의 장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고백은 스스로 자백한 건축가들의 오만불손이자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이 같은 발언을 보면서 우리나라 건축가의 공동 의식, 시대정신의 현주소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흔히 ‘전문직’하면 변호사나 의사를 떠올린다. 그들은 고객이 가지고 있는 유ㆍ무형의 자산, 즉 고객의 건강이나 권리, 재산 등을 지키기 위해 전문 지식을 발휘하고, 그 역할에 대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어떨까? ‘사(士)’ 자가 붙는 ‘건축사’는 전문 직종인데 반해, ‘가(家)’ 자로 끝나는 ‘건축가’는 화가나 소설가, 음악가처럼 순수하게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인 것일까?

 

주택 설계는 작업의 프로세스와 거래의 형태를 보면 오더메이드(맞춤 제작)와 유사하다. 해당 브랜드, 혹은 디자이너의 디자인 철학에 매력을 느낀 고객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더메이드의 경우에도 고객의 취향과 희망사항은 매우 중요하고 우선시된다. 디자이너는 고객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집중한다.

‘디자인 철학의 순수한 표현의 장’으로 쓰라고 고객이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세상의 이치를 초월하고 건축가만이 특별한 존재로 있어도 되는 이유가 있을지, 건축가라는 업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당연히 주택도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삶을 위한 그릇’이라는 용도에 충실하게 만들어져야 하는 건축이다. 각각의 건축주가 꿈꾸는 삶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존재하기에 결과적으로 다양한 모습의 주택들이 탄생하게 된다. 이렇듯 개별적으로는 전혀 사회성을 가지지 않는 주택들도 시대나 기후, 지역, 민족 등 세그먼트로 나눠서 본다면 일정한 특징을 지니기 마련이다. 이러한 특징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정된 재화와 실현 가능한 기술을 동원해, 그 시점에서 본인이 생활하기에 최선이라고 믿는 집을 짓고자 하는 건축주의 바람은 늘 같기 때문이다. 이런 절실한 바람 앞에서 건축가의 사상이나 개인적인 욕심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설계자는 건축주에게 믿을 수 있는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 건축주의 희망 사항을 잘 듣고, 해당 필지와 주변 환경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제한된 조건 속에서 건축주를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배치, 동선 계획, 입면 및 평면 계획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보다 합리적이고 저렴한 방법, 같은 비용이면 보다 내구성이 좋은 방안을 선택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옳다.
혹여 건축주가 그런 조언을 듣고 검토를 한 후에도 “그래도 이렇게 하고 싶어요”라고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이 답인 것이다. 건축주는 본인의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 자신이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하고, 추후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스스로 지게 된다.

물론 설계자는 조언자이지 건축주의 하수인은 아니다. 건축주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열악한 구조 강도 등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 특정 자재의 잘못된 사용에 따른 건강에 대한 우려, 혹은 장비 등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 등이 예견될 경우에는 이에 대한 적극적인 이의 제기를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특정 집단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적인 상징을 사용하려는 등 타자에게 심리적 모욕감이나 혐오감을 줄 가능성이 높은 디자인에 대해서도 건축주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재고를 독촉하는 것이 직업윤리 측면에서 옳은 태도가 맞다. 아무리 건축주가 ‘싸게 싸게, 대충’을 강조해도 H빔으로 지탱해야 하는 구조물을 C형강으로 대체해서는 안 되고, 아무리 건축주가 ‘멋진, 심플한’을 요구해도 위태롭게 얇은 기둥으로 건물이 붕괴되고 옆집을 덮칠 우려가 있다면 그런 건물을 설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자명하다.
 
또한 건축주가 어디서 들은 정보로 ‘우레탄 단열재로 내단열을 하겠다’고 희망한다면 화재 시 발생하는 유독가스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외단열로 설계를 변경하거나 다른 단열재를 추천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일본의 명문대 교수이기도 한 어떤 건축가는 타원형의 노출콘크리트 주택을 설계하면서 내단열로 우레탄을 사용했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유독가스로 인한 질식사의 위험성보다 ‘설계 사상의 순수한 표현’이 더 중요한 것일까? 이런 사례들이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에 건축가가 스스로 의도한 공간을 실현할 수 있는 ‘설계 사상의 순수한 표현의 장’을 가지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 남아 있다. 스스로가 건축주가 되어서 건축가의 자택을 계속 지으면 된다. 세계의 많은 선배 건축가들이 그렇게 살았듯이 ‘설계 사상의 순수한 표현의 장’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박성호  aka HIRAYAMA SEIKOU
NOAH Life_scape Design 대표로 TV CF프로듀서에서 자신의 집을 짓다 설계자가 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단독주택과 한국의 아파트에서 인생의 반반씩을 살았다. 두 나라의 건축 환경을 안과 밖에서 보며, 설계자와 건축주의 양쪽 입장에서 집을 생각하는 문화적 하이브리드 인간이다. 구례 예술인마을 주택 7채, 광주 오포 고급주택 8채 등 현재는 주택 설계에만 전념하고 있다. http://bt6680.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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